뇌의 도전
死後 엄정한 평가거쳐 내리는 ‘시호’

살아남기위한 슬픔

병동의 추억
우리들만의 순위
서민들의 걱정거리
암호 시대
그 시절의 여운

인터넷 쇼핑의 고독
끝없는 자기수행

폭력 냄새나는 말
‘대한민국 싸우지마’
신종 직업의 세계
책을 편히 집어들 마음

깡패들의 아버지
눈으로 사진을 찍는 일
자랑스러운 ‘옛책’ 널리 알리자

엉뚱하면 좀 안되나
‘한국판 쉰들러’ 
“네 멋대로 해라”
분출하는 하위문화
주변에서 본 존 쿠치
문학 나이로는 난 아직
“한국 불교는 귀족 불교

한국불교에 ‘죽비’ 

 

 

뇌의 도전

도전은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다. 불가능이라 생각하던 것에 대한 성취는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져오고,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높은 차원의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도전은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다. 불가능이라 생각하던 것에 대한 성취는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져오고,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높은 차원의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올림픽을 통해 인간은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육체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했고, 그 도전과 역동의 에너지는 사회 곳곳에 하나의 문화로까지 자리 잡았다. 올림픽이 가져온 끝없는 도전 정신은 곧, 그것을 토대로 인류가 일구어 온 물질문명의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육체의 한계를 넘는 도전의 에너지는 오늘날 발달한 인류문명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인류의 위기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대립, 분열 속에서 정신적 가치는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성장과 완성의 삶이 아닌 성공과 승리를 향한 삶의 패러다임이 하나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지구촌을 하나로 잇는 문명의 발전 속도보다 ‘인간성 상실’로 대변되는 정신적 가치의 퇴보 속도가 더욱 빠른 것은 지난날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의 허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이다.

필자는 인류와 지구의 미래는 인간이 자신의 뇌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뇌가 가진 창조와 평화의 본질적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고, 자신의 뇌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믿는다. 지난 25년간 ‘뇌’를 탐구해온 것도, 현대단학과 뇌호흡을 통해 심신의 건강회복과 대중적 깨달음을 추구해온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뇌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다. ‘국제 브레인 HSP 올림피아드 (The International Brain HSP Olympiad, 이하 IHSPO)’에는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대상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HSP 브레인윈도(BrainWindow)’란 종목이 있다. 이제껏 눈을 감고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는데, 지난 1회 올림피아드 본선대회에서 무려 150명이 그 능력을 선보였다. 인간의 마지막 보고라는 뇌의 무한한 잠재성에 새로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으며, 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열리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뇌선언문 Brain Declaration

나는 나의 뇌의 주인임을 선언합니다. I declare that I am the master of my brain.

나는 나의 뇌가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I declare that my brainhas infinite possibilities and creative potential(ity)?.

나의 뇌는 정보와 지식을 선택하는 주체임을 선언합니다. I declare that my brain has the right to accept or refuse may information and knowledge that it is offered.

나의 뇌는 인간과 지구를 사랑함을 선언합니다. I declare that my brain loves humanity and the earth.

나의 뇌는 본질적으로 평화를 추구함을 선언합니다.  I declare that my brain desires peace.

Take back your Brain!


뇌 기반 국제올림피아드 창설

이제는 인류가 가진 마지막 자산이자 희망이라는 ‘뇌’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신체 중에서 물질이면서 정신을 담은 유일한 곳인 ‘뇌’의 무한한 가능성이 온전히 발현되었을 때,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삶, 그러한 새로운 도전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는 흐름이 생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특히, 몸과 마음과 의식이 한창 성장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뇌’는 더더욱 중요하다. 더 이상 뇌를 어렵거나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친근하면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뇌가 가진 무한한 잠재성을 자각한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미래의 주역들이 ‘뇌’의 무한한 가능성을 체험하고 도전하게 하는 장, 뇌의 창조성과 그 속에 담긴 평화의 메시지를 자각하는 그러한 국제적인 행사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그 신념과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의 도움으로 2005년 4월 ‘IHSPO’를 창설했다. 올림픽을 통한 도전 정신이 물질문명의 태동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듯, 뇌에 기반을 둔 국제올림피아드는 무한한 뇌의 잠재성에 대한 체험과 더불어 뇌의 본질인 평화로움에 대한 자각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또한 ‘HSP’는 창조와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인류 모두가 원하는 건강(Health), 행복(Smile), 평화(Peace)의 뜻을 담은 동시에, 뇌의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는 HSP (Heightened Sensory Perception : 고등감각인지)의 약어이기도 하다. 뇌에 기반한 올림피아드를 통하여, 뇌의 본질적인 기능인 ‘창조’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뜻이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시작된 이 올림피아드가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 여러 면에서 성장했다. 올해 5월 개최되는 2회 대회에는 1987년 중남미 분쟁종식의 공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현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공동대회장을 맡고,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하여 UN산하 기구 중 교육, 과학, 문화영역을 포괄하는 국제기구인 UNESCO(유네스코)의 한국기관인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공식후원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도 본선에 참가하기 위해 100여 명의 참가단이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시작된 국제올림피아드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제2회 국제브레인 HSP올림피아드’가 우리 미래의 주역들에게 오늘날의 인류문명을 건설해온 뇌의 무한한 창조성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인류가 원하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드는 열쇠가 바로 우리의 뇌 속에 있음을 깨닫는 무대가 되기를 희망해 마지 않는다.

이승헌<한국뇌과학연구원 원장,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死後 엄정한 평가거쳐 내리는 ‘시호’

=[새미기픈믈](5)우복시장=

우리 전통시대에는 시호(諡號)라는 호칭이 있었다. 그러나 시호를 고관의 사후에 왕이 내리는 예칭으로만 알고 있다면 잘못이다. 시호는 유교적 포폄(褒貶)에 입각한 엄정한 인물 평가의 결과였던 것이다. 학덕과 치적을 겸비한 관리에게는 선시(善諡)를 내렸지만 반대로 역사의 오명인 악시(惡諡·나쁜 시호)를 내린 경우도 많았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의 관료들은 ‘문(文)자’ 시호를 선호했다. 일설에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은 약 2,300명이고, 그 중 ‘문’자 시호는 30%에 이른다고 한다. 예컨대 퇴계의 시호는 문순(文純)이었고, 율곡은 문성(文成)이었다.

한편 ‘악시’의 대표적인 글자는 하·은의 마지막 왕인 걸(桀)·주(紂)였다. 이외 무고한 이를 살육했다는 뜻의 여(●), 쾌락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했다는 뜻의 황(荒), 허물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뜻의 여(戾)도 악시의 단골 글자들이다. 악시는 당사자는 물론 후손에게도 커다란 부담이 되어 개정 요구가 잦았지만 좀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컨대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가 황무(荒繆)로 정해지자 온 집안이 이를 갈며 실무자를 압박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또 예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은 사리에 밝고 실무에 능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내린 시호는 악시에 가까운 정정(丁靖)이었다. 문제는 ‘의를 행함에 능하지 못했다’는 의미의 정(丁)자였고, 결정 과정에 동생과 사위의 횡령죄가 작용했다는 설이 나돌자 아들이 10여차례나 상소하여 개정을 간청했다. 하지만 조정은 끝내 이를 기각했다.

지난 12일 우복 정경세의 후손이 장서각에 기탁한 ‘우복시장’(愚伏諡狀)은 시호를 내릴 때까지 행정의 전과정을 담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고문서다. ‘우복시장’은 송시열이 지은 정경세의 행장과 1663년 문숙공의 시호가 내려지기까지 수수된 각종 공문서의 원본으로 구성돼 있다. ‘우복시장’에 따르면, 시호의 투명성을 위해 예조·봉상시·홍문관·이조·의정부 등 5개 부서를 거친 뒤에 국왕의 재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3망(三望·시호 3개의 후보군)의 선정권을 정승·판서가 아닌 홍문관의 하급 관리에게 부여한 것은 행정의 백미였다.

왕이 3망 중 하나에 낙점한다 해도 끝난 게 아니었다. 후에 감찰기관의 인준 절차인 서경에 통과해야 시호가 확정되어 교지를 발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헌부·사간원에서 심의하여 3심에서도 인준을 거부하면 모든 절차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경세의 경우 그에게 내려진 ‘시호망(諡號望)’은 문숙(文肅), 문헌(文憲), 문장(文莊) 등이었다. 그런데 예조-이조-의정부 등을 거쳐 현종이 ‘1순위(수망·首望)’로 올랐던 ‘문숙’으로 시호를 내리기까지는 무려 6년이나 걸렸다. 시주(諡註:시호에 담긴 뜻)는 ‘근학호문(勤學好文), 강덕극취(剛德克就)’다. 그러나 이 문숙이란 시호도 1693년 영남유생들의 건의에 따라 3순위(말망·末望)였던 ‘문장’으로 바뀐다.

시호의 의미가 그렇게 심오했고, 또 행정의 절차가 철저했다고 해서 조선의 고관들 모두가 학덕을 겸하고 청백리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행태가 사후의 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의식하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역사와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하여 언행을 조율하고 직분에 충실한 고위층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부정이 들추어지기 무섭게 결백을 항변하고, 비리가 탄로나도 금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거라 믿는 도덕 불감의 시대에서 시호제도를 진부한 옛 이야기로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루터기]살아남기위한 슬픔

나는 깜짝 놀랐다. 어딘가를 바쁘게 나가려고 외출 준비를 하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머리 속에서 호출을 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계를 호출할 생각을 하다니…. 가끔 호출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헤맬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전화를 걸어 호출기 음을 듣고 호출기를 찾곤 했다. 그런 편리한 마음이 무의식중에 작용해 시계를 호출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섬뜩했다. 모든 사물들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일다니….

나는 서울시내 도로 소통 현황이 무인 카메라에 의해 TV에 생중계될 때마다 기분이 좀 언짢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는 점이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슈퍼마켓, 현금 자동 인출기, 지하철 승강장, 엘리베이터 등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서 눈만 발달된 우주인 같은 외눈박이 카메라가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가히 유쾌하지 않은 현실이다.

또한 인공지능 센서가 감지하여 상황에 따라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 아파트 현관문에 장치된 전등이 그렇고 자동 개폐문도 그렇다. 화장실 변기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을 먼저 알아보고 물을 흘리고 볼일을 보고 나면 다시 물을 흘려 제 몸을 닦아내기까지 한다.

물론 안다. 이 모든 것들이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 감시 카메라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고도화된 문명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무궁화 위성이 발사되는 날 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통신 세계의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던 그 날. 우리는 지구 바깥으로 무궁화 위성이라는 지구의 살점을 베어 던져 버린 것이다. 다시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슬픔 덩어리가 꼬리에 붙은 불에 쫓겨 대기권 밖으로 축출되었던 것이다. 그 날 지구의 무게는 그 위성의 무게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모든 사물에도 생명이 있다는 동학의 활물사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슬픈 일이 아니던가. 꼭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고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현실이.    <함민복/시인〉

 [그루터기]병동의 추억

최근에 어린 딸이 병원 소아과 병동에 입원을 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해 있는 동안 본 병동의 풍경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주로 기관지 폐렴 등의 병명으로 입원한, 유치원생도 안된 나이의 아이들이 한 병실에 있었다. 아이들은 한쪽 손에 링거주사를 꽂고 침대 위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간혹 친할머니가 봐주기도 했지만, 낮에는 주로 외할머니 또는 이모들이 봐주거나 시간당 3,000원짜리 베이비시터가 봐줬다.

저녁이 되면 직장에서 퇴근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병원으로 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낮에는 잘만 놀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만 보면 신경질을 내고 밥투정을 하고 심지어 발길질까지 했다. 항생제 후유증인지 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멀쩡하던 아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손목에 잘 달라붙어 있는 링거 주사바늘을 뽑아버리기도 했다. 간호사에게 불려가 주사바늘을 다시 꽂기까지 10여분, 아이들은 죽어라 울어댔고 하이힐도 못 벗고 달려온 엄마들은 자식이 불쌍해 벽을 잡고 울었다.

밤이 되어 아이들이 잠들면, 병실을 지키던 부부 중 한 사람은 교대로 집으로 돌아갔고, 남아 있는 부모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낮에 와서 애들 봐주는 시부모와 며느리의 갈등 문제, 누구도 통제를 못하는 엄청난 사교육비 문제, 나날이 버릇이 없어져가는 아이들 키우기의 어려움, 대단히 권위적인 병원 문화 등등. 우리 사회의 허리를 이루고 있는 세대들이 그 밤에 병실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들이었다.

어떤 부모가 아이가 퇴원하는 날, 아이에게 브이 자를 그리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것도 추억이잖아!”라고 말하면서. 하긴 그렇다. ‘트레인스포팅’이란 영화를 만들었던 영국의 대니 보일 감독의 SF 호러 영화 ‘28일 후’의 첫 장면도 병원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감독이 준비한 두 개의 결말 중 비극적인 결말이 다시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문명사회가 점점 더 발달할수록 병원은 이제 병을 치료하고 나가면 그만인 단순한 장소가 아닌 것 같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종 현대병들의 출현으로, 이제는 정신력과 자연 치유력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거대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병원을 더 자주 찾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신인류인 아이들도 이제 병원을 스케이트장이나 만화방처럼 추억의 장소의 하나로 추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강영숙/소설가〉최종 편집: 2003년 12월 14일 18:18:27

 [그루터기]우리들만의 순위

나는 운동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비록 할 줄 아는 종목은 하나도 없지만 구경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 신문도 스포츠 면을 가장 먼저 읽는다. 한·일전 같은 축구시합은 빠뜨리지 않고,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던 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응원했던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암표라도 사서 구경을 한다. 투수가 던진 공이 한 순간 크게 보일 때, 선수들은 그 순간 어떤 회의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골문을 향해 공을 찰 때 선수들은 과연 이것이 맞는 길일까 하고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들이 부러웠다. 순수한 순간. 그 1초를 느껴보고 싶었다.

운동경기를 보다 보면 내가 꽤 심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올림픽 중계를 보다가 한국선수가 은메달이라도 따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에이. 은메달밖에 못땄잖아.” 한·일전에서 지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다. “정신력이 문제야.” 물론, 메달의 색깔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정신력만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낡은 사고방식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쓰고 있다니!

스포츠 뉴스를 보면 이런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이 우리에게 퍼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선수가 은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앵커는 그날 스포츠 뉴스에서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항상 ‘아쉬운’ 것이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른’ 것이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같은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더 확실해진다. 은메달 10개를 딴 나라보다 금메달 1개를 딴 나라의 순위가 항상 높으니까.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자꾸 들었다. 마라톤 선수가 이를 악물고 달리는 것은 무엇이고 양궁 선수가 한 점을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이나 그냥 많이 딴 메달의 순서로 순위를 매기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나라의 여유가 부러웠다. 각 나라의 메달 수를 발표하긴 하지만 그 국가 이름 앞에 1위나 2위라는 순위는 절대 적지 않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나라의 관용이 부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등수를 가지고 우리들끼리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뒷목이 뻣뻣해진다. 이 땅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고정관념들은 얼마나 많은가! 〈윤성희/소설가〉최종 편집: 2003년 12월 09일 18:41:56

 [그루터기]서민들의 걱정거리

외곽도시에 살다보니 종종 장거리 심야택시를 탑니다. 그때마다 저는 걱정이에요. 우선 난폭한 택시기사를 만나면 바가지 요금이나 교통사고를 맞닥뜨리게 될까 걱정이죠. 착하고 성실한 기사 아저씨를 만나면, 이번엔 이 아저씨가 빈 차로 돌아가게 될까봐 그게 또 걱정이 되지요. 특히 선량해 뵈는 아저씨와 말을 나누다 보면, 도착할 즈음이 되어 저는 어김없이 미터기를 쳐다보며 매우 갈등하게 됩니다. ‘잔돈을 받아야 하나, 그냥 넣어 두라고 해야 하나’ 하고요.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지요. 한번은 신호대기중에 기사 아저씨가 주무시는 게 아니겠어요! 도착할 때까지 저야말로 눈 부릅뜨고 조마조마하는 마음이었지요. 평소 택시에서 내릴 때 정말이지 저를 제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제가 내리자마자 바로 이어서 다음 손님이 탑승할 때지요.

또 물건을 구입할 때도 저는 그냥 선뜻 구입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지요. 설마 내일부터 세일하는 건 아닐 테지? 하고요. 그러면서도 행여 빈티나 보일까봐 정작 점원에게 곧 세일이 시작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해요. 다행히 아내는 저와 달라서, 점원의 대답과는 달리 구입한 다음날 세일에 들어가자 도로 찾아가 싸워서 끝내 세일 차액만큼 돌려받는 대단한 쾌거를 거둔 적이 있답니다. 정말 멋지고 든든합지요.

그런데 최근엔 또다른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어렵게 사는 서민들이 대개 그렇듯이, 저도 로또복권을 가끔 구입하지요. 제가 즐겨 찍는 번호는 의당 제 주민번호인데, 그러다 보니 아주 심대한 걱정거리가 새로 생긴 거예요. 만약 복권을 구입하지 않았는데 행여 이 번호가 걸리면 어떡하죠? 생각해 보세요. 복권을 구입하지 않은 어느 주말 우연히 당첨번호를 봤는데, 여섯 숫자 모두 자신의 주민번호라면? 오호통재! 복권을 구입하지 않은 어느 주말 저녁, 저는 심지어 이런 기도까지도 하게 되었어요. “하느님, 어떤 사람이 당첨되어도 좋으니, 제발 제 주민번호가 아니오길 비옵니다!”

어느덧 한해가 저물어 가네요.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졸면서 운전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던 점원 아가씨,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악착 같던 아내, 그리고 재산세보다 복권구입비로 더 많이 지불하고 살아가는 저를 비롯한 우리 서민들…. 이런 고생 저런 걱정 그리고 수많은 갈등하시며 사느라 올 한해 무던히도 바쁘셨지요? 무릇, 소식 끊긴 친구 찾아 술 한잔 나누고픈 12월이네요. 〈이만교/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2월 07일 19:21:21

 [그루터기]암호 시대

어느 시골동네의 은행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은행직원이 할머니 한 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 비밀번호가 뭐냐니까요!” 할머니가 얼른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소리로 “비둘기” 하고 후딱 대답했다. 황당한 은행직원이 다시 한 번 묻자 손으로 입을 가린 할머니가 비밀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아이구 참! 비, 둘, 기!” 그러자 짜증이 난 직원이 소리쳤다. “할머니, 지금 장난치는 줄 아세요? 자꾸 그러시면 돈 못 찾아요.” 그제야 할머니가 비밀번호를 말씀하시는데 온 은행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9999.”

이 이야기를 읽으니 옛날 반공드라마에서 간첩이 암호로 접선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간첩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수십 개의 암호를 가지고 있다. 암호라고 하니 촌스럽고 음침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패스워드니 비밀번호니 하는 것들을 몇 개씩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특히 인터넷시대가 도래하면서는 수많은 비밀번호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었다.

나만해도 그렇다. e메일을 여는데 서너개,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 네댓개. 거기다 각종 동호회니 커뮤니티니, 인터넷 서점을 비롯한 각종 쇼핑 사이트나 예약서비스를 받는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10여개. 게다가 은행통장의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단계별로 요구되는 8자리 인터넷뱅킹, 폰뱅킹용 비밀번호는 또 얼마나 많은가.

거기다 좀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집도 마음대로 드나들기 어렵다. 아파트 현관출입을 위한 비밀번호, 엘리베이터 탑승을 위한 비밀번호, 자기집 현관을 여는 비밀번호….

비밀번호라 남이 볼까 무서워 메모도 해두지 않다가 머리의 기억용량이 적은 나는 가끔 낭패를 볼 때가 있다. 그 많은 암호나 비밀번호가 헷갈리거나 도무지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럴 땐 내집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처럼 서러움과 소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머리 나쁜 내 자신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비밀번호를 몇 번 잘못 눌렀다가 신용카드를 못쓰게 되었을 땐 울분마저 느꼈다. 그러다 한때 생각해낸 것이 암호수첩을 만든 것인데, 그걸 또 잃어버렸을 때의 낭패감이란! 그러다 요즘엔 가능하면 단순하게 통일시키는 작전을 펴고 있다.

누구를 위한 비밀번호인지…? 이 암호의 시대에 우리는 난수표 같은 비밀번호와 암호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비밀이 많은 인간은 불행하다. 암호라면 간첩들이나 쓰는 줄 알았던 옛날이 그립다. 아 옛날이여! 〈권지예/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2월 04일 18:53:53

[그루터기]그 시절의 여운

나의 외할머니는 일찍 혼자 몸이 되셨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지만 다섯을 어려서 차례로 앞세우시고 하나 남은 아들마저 살림 넉넉했던 이모할머니 댁에 양자로 보내고 딸 하나,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만을 애지중지 키우며 힘겹게 살아오셨다.

일찍 하늘로 간 자식들에게 못다 한 사랑을 외손자들에게 아낌없이 쏟으셨는데 형제들 중 유독 나는 할머니를 따랐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그 분의 묵묵하고도 참을성 있는 세월은 내게 있어 치마저고리 입고 가르마를 탄 마리아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밤이면 하느님께 하듯 외할머니께 시간까지 정해놓고 기도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강화 외할머니 댁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온갖 진귀한 열매와 꽃들, 곤충과 함께 나는 찬란한 유년의 시간을 보냈다.

안방에는 예닐곱살의 내 키보다 더 큰 괘종시계가 있었다. 밤에는 온종일 논일 밭일로 고단해진 할머니가 먼저 잠드시고 거대한 시계추 소리만이 가득 찬다. 그 소리에 맞추어 작은 방도 좌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호롱불 심지에 따라 고구마 자루며 꼬다만 새끼줄, 못에 걸린 옷가지가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흔들리는 벽에 나는 늑대와 토끼, 새 등 손그림자를 만들어 보태며 놀곤 했다. 마치 동굴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시계 종소리가 대앵 대앵 울리면 잠시 후 먼 곳에서 화답하듯 여우울음 소리가 길게 이어졌는데 그때쯤이면 이불을 훌렁 뒤집어쓰고 할머니 등에 바짝 붙어 숨죽이고서 가만히 이불 한 귀퉁이를 열고 마치 산의 도깨비와 바다의 물안개가 껴안으며 내는 듯한 여우울음 소리에 귀를 세웠다. 두렵고도 가슴을 파고드는 그 소리는 나를 밤새 여우와 호랑이, 선녀가 사는 저 산 너머 동화 속의 나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새벽이면 언덕 위 예배당의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고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머리맡을 물들이면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밥을 지으러 나가시는 할머니의 버선발 소리가 포근했다.

외할머니의 따사로운 사랑과 아득하고 원시적인 소리와 빛, 자연의 행복 속에 나의 유년은 흘러갔다. 지금 우리 주위에 마음 없는 활자와 말들, 넘치는 기계음들에 비해 그때 그 시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는 얼마나 깊은 여운과 상상의 그림자를 던져주었는지. 〈강신애/시인〉 최종 편집: 2003년 11월 30일 19:23:57

[그루터기]인터넷 쇼핑의 고독

요즘 들어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사는 일이 꽤 많아졌다. 책을 사고 고르던 것으로 시작된 인터넷 쇼핑이 최근에는 생필품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사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처음 인터넷 공간을 통하여 물건을 살 때는 미덥지 못하여 애써 시간을 내서 직거래를 하기도 하고 확인차 오프 매장을 찾아가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폭탄 가격 공동구매’라는 무시무시한(!) 선전을 앞세운 기저귀와 분유 판매광고에 이끌려 물건을 사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쇼핑의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형마트에 가서 낑낑거리며 무거운 물건들을 한꺼번에 사오던 그 시간들이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한 것이다. 마트의 구석에서 일일이 찾아내야 하는 세밀한 생활용품을 집에서 손쉽게 배달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얼마 전에는 친구에게 인터넷 쇼핑을 통해 뒤늦은 결혼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몇년 만에 전화하려니 쑥스럽고 만남의 약속을 정하려니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생각해낸 묘안이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다. e메일로 안부를 전하고 선물을 택배로 전달하는 과정은 직접적인 만남이 가져오는 어색함과 민망함을 피하게 해주었다.

물론 상품의 이미지만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과정은 그만큼의 위험부담도 암시한다. 원하는 시간에 제대로 물건이 도착할 것인가, 구입한 물건에 결함은 없는가, 실제 필요한 물건을 산 것인가에 대한 자책과 고민은 구매가 끝난 그 순간부터 사람을 괴롭힌다.

무엇보다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혹적인 소비의 시스템은 기능성을 앞세워 인간적 만남의 기회를 차단한다. 상점에 가서 구경하고 만지는 여유로운 과정에서 이루어질 일상적인 만남의 시간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선물을 고르면서 그것을 받는 상대방의 얼굴을 상상해보는 시간이나 가게의 주인으로부터 이런저런 생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역시 점점 짧아진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생략된 그 소중한 시간은 정작 인터넷에서 상품 리스트를 배회하는 시간으로 쉽게 흘러가곤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인간적 온기를 나누는 시간은 어색하고 길지만 흩뿌려진 광고와 정보 속에서 헤매는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때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매혹적이고도 허무한 그 배회의 시간은 소통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이기적인 문명인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고독의 짐인지도 모르겠다. 〈백지연/문학평론가〉 최종 편집: 2003년 11월 27일 18:44:16

출가…환속…인도행…‘끝없는 자기수행

=달라이라마 책 잇따라 펴낸 주민황씨=

달라이라마 팬들에게 주민황(47)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는 최근 출간된 ‘평화롭게 살다 평화롭게 떠나는 기쁨’(넥서스북스)을 포함해 달라이라마 책 3권을 내리 번역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티베트 불교의 고수다. 그곳에서 만 10년을 뿌리박고 살았다. 티베트 사람과 티베트 종교를 속깊이 체득한 뒤 국내에 들어와 대학 강단(동국대)에 섰다. 달라이라마의 저서와 티베트 불교 서적을 번역하는 것은 그에게 생계를 잇는 일이라기보다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한 자기수행의 변형된 방식이다.

그가 택한 길은 일찍부터 남달랐다. 한때 비구니였다가 환속했고, 그러다 홀연 티베트로 날아갔다. 남들은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기대감으로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려 하지만 주씨는 오히려 덤덤하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우연’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을 더듬어보면 우연보다 더 큰 자유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대학(서강대)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불교였죠. 대학졸업 몇년 뒤 친구 소개로 한 비구니 스님을 알게돼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6개월만에 수계를 받은 뒤 강원(講院)에 들어가 스스로 닦고 깨치는 생활을 했다. 이후 승복을 입은 채로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 과정을 밟기도 했다. “아직 나를 완전히 못버린 것 같다”는 자괴감으로 승복을 벗은 뒤 인도행을 택했다. 1989년 그는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사람들이 망명해 살고 있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터를 잡았다.

그가 기억하는 달라이라마는 “감기에 걸려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법문을 들려줄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생 구원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가 겉으로 보기엔 카리스마로 뭉쳐진 사람 같지만 실제 그 앞에 가보면 너무도 편안해 사람들이 펑펑 울 정도”라고 했다.

주씨는 앞으로 1년에 몇달씩은 인도에 가 있을 생각이다. “인도에서는 무소유 상태에서도 만족하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수행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아서”이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장관에서부터 청소부까지 모두가 평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그곳을 그는 벌써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1월 27일 18:44:01

[그루터기]폭력 냄새나는 말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매년 여름마다 수마란 말을 듣는다. 수마(水魔). 몸의 거지반이 물로 된 인간이 물에 대해 마란 말을 쓸 수 있을까. 아무리 물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도 마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있을까. 옛사람들처럼 그냥 큰물이 났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나는 자연보호란 말이 자연을 얕잡아보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말임을 글로 쓴 적이 있다. 자연이 사람의 보호를 받을 만큼 나약한 존재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하는 요지의 글을 쓴 이후 나는 우리가 쓰는 말에 의미를 되새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땅이 거북 등처럼 갈라졌다. 거북 등이 갈라지면 거북은 죽는데 거북 등 무늬 모양으로 갈라졌다고 써야 옳지 않을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쥐는 어둠을 좋아하는데.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다. 민중은 모두 지팡이가 필요한 만큼 나약한가. 민중을 얕잡아보던 군사독재 시절에 쓰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

이러한 습관은 내 시 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령 공기총이란 시에서는 공기를 총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점을, 식물인간이란 말을 생각하면서는 식물이란 말도 무섭게 들려 올 때가 있음을, 이라크 전쟁 때는 폭탄 중에 어머니란 별명을 가진 폭탄을 생각하며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는 미국사람들의 충격적 정서에 대해 썼다.

요즘에는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을 되새겨보기도 한다. 풀을 베다가 쉬면서 맡는 풀 냄새는 정말 향기로운 것일까. 몸 잘린 풀의 냄새가 향기롭다니.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다니. 새소리에 나비가 놀라고, 다가오던 방향을 바꿔 꽃빛깔이 순간 흔들렸을 텐데. 내 감각에, 잔인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폭력성이 이미 내재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내재된 폭력성을 이마에 버젓이 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는 폭력 냄새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되새겨보지 않고 묵인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쓴 시집들은 제목으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는 않았을까. 나 먼저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함민복/시인〉 최종 편집: 2003년 11월 25일 18:27:10

‘대한민국 싸우지마’ 세태풍자 가요 열풍

비자금 수사, 이라크 파병, 노사문제, 부안 원전센터 건설…. 이런 현안들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풍자한 무명 가수의 노래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개그맨 출신 가수 서희씨(본명 서선택)의 ‘대한민국 싸우지 마’는 새태를 통렬하게 풍자한 가사로 최근 사회 각 부문의 이전투구에 신물이 난 네티즌과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16대 총선 당시 이정현씨의 ‘바꿔’가 정치권 물갈이 여론에 맞춰 뜬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노래는 “여당야당 천년만년 서로 싸우고/좌익우익 해방 때부터 아직까지 싸운다/노사파업 죽자사자 밤새 싸우고… 참교육과 공교육은 나몰라라 싸우고/어린 청춘 사교육에 시들어 간다/촛불시위 몸싸움에 하루해가 저물고”라고 비꼰다. “공부 쪼까 하는 분은 고시만 파고/머리 쪼까 돌아가는 분은 고스톱만 친다… 뇌물선수 너네 아빠는 억대 고위층/만년계장 우리 아빠는 사사구 도토리/강남땅 아파트에는 억대 부유층/신용불량자 카드 돌려막기 언제나 끝날까”라는 가사처럼 굴절된 인간군상도 질타 대상이다.

이어 “오천년의 찬란한 역사 제발제발 더럽히지마 제발제발 싸우지들 마”라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이 노래는 KBS 1TV 9시 뉴스, MBC TV 아주 특별한 아침,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 같은 프로그램이 다뤘고, 다음·야후·네이트 등 인터넷 사이트들도 앞다퉈 소개하고 있다. 트로트 곡임에도 경쾌한 박자와 재미있는 가사 때문에 젊은 네티즌들이 즐겨 듣고 있다. 네티즌 ‘가을하늘’은 “제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노래로 불렀다”며 “이 노래가 많이 알려져 싸우기보다 대화와 이해로 풀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독도는 우리 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만든 박인호씨가 작사·작곡했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씨가 편곡했다. 〈최우규기자 banco@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1월 25일 18:14:49

[그루터기]신종 직업의 세계

60세가 된 지금까지 늘 직업을 갖고자 애쓰며 살아온 이모가 최근에 새로운 직업찾기에 나섰다. 고령자취업센터에 다녀온 이모가 전화로 한 말의 요지는 이렇다. 8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한 명 있는데 돌봐줄 자식도, 부인도 없는데 돈은 좀 있다는 것이다. 큰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데 거동이 불편해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모는 그 할아버지를 돌봐주고 월급을 받는 일에 취직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이모는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의견을 물어왔다. 또 엉뚱한 소리를 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진심으로 그 직업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모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씻기고 밥도 떠먹이고 빨래도, 청소도 하고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도 볼 것이다. 힘이 없는 할아버지 대신 쇼핑 카트를 밀며 쇼핑도 할 것이다. 바깥바람이 그리운 할아버지가 천천히 이모 뒤를 따라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여름 프랑스에서는 모두들 휴가를 떠난 빈 집에 남아 있던 노인들이나 혼자 살던 노인들이 바캉스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사망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보면 좋은 일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일은 전통사회에서는 노인공경이라는 덕목으로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었던 일이고 최근까지도 사회봉사 차원에서 해결되었던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에 대한 대가가 정확하게 계산되고 주어지는 자본주의 시대다. 앞으로 이런 식의 인간 대 인간의 보살핌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직업의 형태로 자리잡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할아버지와 이모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다면 이 고용관계는 어떻게 변질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신성한 노동이 로맨스의 경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두 가지의 사항을 당부했다.

첫째, 로맨스는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것. 둘째,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누워 지내게 되는 순간이 오면 고용관계는 자동 파기된다는 약정서를 받아둘 것. 내 생각은 과연 이 시대의 윤리와 걸맞은 것일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강영숙/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1월 23일 19:18:06

[그루터기]책을 편히 집어들 마음

글쓰기를 업으로 하고 있다 보니,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왜 요새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 자리에서는 진부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렇다는 등, 원래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두 명꼴이었다는 등, 책보다 재미있는 게 지천이라는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는 시대 탓이라고.

그래서 나는 요새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한 사람에게, 한 주 동안 녹초가 된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한 달 내내 돈 버느라고 죽을 똥 싼 사람에게 한 달에 책 한 권도 안 읽었다고,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열심히 던지고 있다. (‘느낌표!’ 같은 미디어 프로그램이 가장 열심히 던진다.) 맞은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지만.

한데 생각해보니 나 역시 책을 안 읽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직업(글쓰기)에 충실하면 온 몸이 축 늘어져서, 여가에 책을 붙잡고 있기가 싫다. 요새 재미난 게 얼마나 많은데 사서 고생하나.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릴까?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하다. 넌 작가잖아? 작가가 책을 그렇게 안 읽어서 무슨 글을 쓰지? 너의 글이 그토록 박약한 것은 무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안 읽어서 말이야.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문제는 반성을 해도 책에 손이 쉬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책을 항상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읽었던 듯하다. 머리에 든 것 있는 학생으로 보이기 위해, 소설을 공부하기 위해, 작가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안 읽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식하다고 하니까. 즉 강박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책을 붙잡았던 것이다. 때문에 이젠 진력이 나서 여가에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책이 즐거운 놀이 상대로 보이지 않고 머릿속을 고문하는 괴물로 보이니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책에 관한 좋은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느낌표!’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책에 대하여 쌓아온, 갖고 있는, 후대에 계승해 주고 싶은 강박관념의 토로장이다. 그런데 그 강박관념이야말로 요새 사람들이 책을 안 읽게 만드는 진짜 범인이 아닐까? 훈련소 입소를 앞둔 청년이 이발하듯, 비장한 각오로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없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이 아니라, 책을 편하게 집어들 마음이 아닐는지. 〈김종광/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1월 20일 18:33:25

잘나가던 의사서 ‘깡패들의 아버지’로

=[삶속의 종교, 종교속의 삶](1)안성 시온성교회 박보영 목사=

사람마다 믿음의 방식은 다릅니다. ‘믿음’으로 다가가는 길이 제각각이듯 성직자마다 신자들에게 전하는 믿음의 방정식도 다양하고 독특합니다. 이 시대 이 땅의 성직자들이 그려내는 믿음은 어떤 색깔의 그림일까요. 일반 성직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믿음’을 그려가는 각 종교계의 성직자들을 매주 돌아가며 만나봅니다.

1997년 어느 겨울 밤. 경기 안성의 11평짜리 아파트에 3인조 강도가 들었다. 밤 1시 기도를 끝내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던 목사님의 배와 목에 강도 세명이 칼을 들이댄 것이었다. 한데 이상했다. 목사님의 마음이 왠지 편안해졌다.

“날 찌르시오. 빨리 좋은 곳으로 가게.” 일촉즉발의 순간. 일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영화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서슬퍼런 강도들이 하나 둘씩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박보영 목사(51·안성 감리교 시온성교회)가 전과자·불량배들과 살게 된 이유다.

◇깡패들의 아버지=당시 전도사 직분으로 개척교회(시온성교회)를 세운 뒤 하루종일 선교하러 다녔던 박목사였다.

“바로 저에게 칼을 들이댄 강도들과 그들이 끌고 온 ‘안성의 조폭’들이 시온성교회 첫 신도였어요. 그때처럼 감격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후 박목사는 항상 적게는 서너명, 많게는 열다섯명 정도의 ‘버림받은 이들’과 살았다. 라면 하나에 한솥가득 물을 끓여 국물만 먹기 일쑤였다. 가난하고 추운 생활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다시 도둑질하고 교도소로 갔다. 아이들은 “아빠(박목사), 나쁜 짓 안하고 살려니 너무 배고프네요. 일한 돈으로 고기와 쌀을 사올게요”라 써놓곤 유혹을 견디지 못했다. 박목사는 기도하고 면회가는 게 하루 일과였다.

교회는 간혹 피투성이가 됐다. 형사들이 들이닥쳐 때로는 난투극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모양이니 신도들이 교회를 찾겠는가. “어떤 친구는 제가 설교할 때 바로 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 ‘힙합바지 언제 사줄거야’하며 예배시간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지요. 또 제 와이셔츠와 신발을 훔쳐가는 통에 속옷만 입고 예배를 인도한 적도 있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본드흡입을 했던 아이는 지금 어엿한 신학대학생이 됐다.

◇돈잘버는 의사=박목사는 잘나가는 의사였다. 의대(중앙대) 졸업 후 서울과 안양에서 피부과 전문의로 병원을 개업했다. 조부가 감리교 성자로 꼽히는 고 박용익 목사이고 부친은 인천기도원 ‘마가의 다락방’을 세운 박장원 목사. 그러나 박목사는 세속의 달콤함에 묻혀 살았다. 골프도 싱글수준을 넘어선 프로선수의 경지. 도무지 부러운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종착역에 다다랐다.

부인과 헤어졌고,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켜 입원했다. 결국 병원도 문을 닫았다. 1년여 투병생활을 하던 90년 어느 겨울날 ‘마가의 다락방’에 놀러간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한다.

“신세한탄을 하러 갔는데 어머님 품처럼 편안하더군요. 그런데 눈을 감은 몇초 동안 어떤 분이 내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어루만진 후 다시 가슴을 꿰매고 저에게 가운을 입히더라구요. 그리고 제 목에 십자가를 걸어주더니 사라지는 겁니다.”

놀라 눈을 떴는데, 그때까지 1분에 200~300번씩 뛰던 심장이 얌전한 것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울이지만 기도원 뒷산으로 뛰어 올라갔고 소리도 질렀다. 심장은 멀쩡했다. 엎드려 회개하고 우느라 먹은 걸 모두 토해냈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었다. 토한 음식을 땅에 묻으며 그는 다짐했다.

“하나님! 이제 의사 박보영은 여기 묻습니다. 저를 쓰시려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군요.” 91년 곧바로 신학대에 입학했고 재산은 교회와 신학교에 기증했다. 수중에 남긴 20만원으로 2년동안 조치원 판잣집에서 기도만 했다. 그리고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박목사의 아들은 대학생이다.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예수님이 밉다”는 것. 지난해 9월 신자 도움으로 교회를 50평으로 넓혔을 때 아들이 왔다. ‘함께 사는 천사들’이 “아들을 바라보는 목사님의 눈이 너무도 사랑에 가득차 있다”고 하자 목사는 아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전과자들과 고아들에게 가는 사랑이 줄어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수, 왜 믿냐구요? 예수가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야 하니까요. 제 아들이 이런 아비를 이해할까요?” 〈유인화기자 rhew@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1월 19일 20:15:35

[그루터기]눈으로 사진을 찍는 일

지붕이 온통 은행잎으로 덮여 있는 집을 보았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던 중이었다. 집보다 배는 더 큰 은행나무 때문에 집은 낮게 가라앉아 보였다. 철로 아래에 있는 집이라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웃한 집들도 보이지 않았다. 혹, 저 집에 부모님을 두고 온 자식이 있다면 그들은 편안히 잠들지 못하리라. 비가 와도 가슴이 철렁하고, 눈이 와도 가슴이 철렁하리라.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쓸쓸한 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 지붕을 보는 순간, 내가 앉아있던 열차보다 저 집이 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뒤덮은 노란색 은행잎 때문이었다. 바람이 한쪽으로 적당히 불어주었는지, 은행잎들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지붕 위에 안착했다. 사진기가 있다면 찍어두고 싶은 풍경이었다. 사진을 찍는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철컥. 내 가슴속에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풍경은 뒤로 물러난 뒤였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종종 눈을 감는다.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찍은 사진은 쉽게 지워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장점도 있다. 언제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고, 기분에 따라 약간씩 변형시킬 수 있고, 세월의 흐름에 맞춰 같이 퇴색되어 간다. 물론, 돈도 들지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쩍 늘었다. 밥을 먹다가, 술을 먹다가, 그들은 카메라를 들이댄다. 며칠이 지나 친구가 보내준 파일을 열어보면, 내가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그 친구가 지웠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진 속의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 그 후로 나는 디지털 카메라를 매우 갖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들곤 했다.

기차 여행을 한 며칠 뒤 꿈을 꾸었다. 산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춥고 배가 고팠다. 그러다 작은 집 한채를 발견했는데, 노란색 은행잎이 마당에 가득했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은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에 밥이 차려져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따뜻한 된장찌개를 달게 먹었다. 잠에서 깨자, 카메라를 사고 싶은 생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내가 마음에 담아둔 사진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안에서 살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최신식의 카메라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윤성희/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1월 18일 18:25:19

[샘이깊은물]자랑스러운 ‘옛책’ 널리 알리자

=(1) 시리즈를 시작하며=

고전은 옛사람의 지혜와 삶의 철학이 담긴 화수분이다. 그러나 옛책의 대부분은 한문이나 필사본 형태로 되어 있어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경향신문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과 공동으로 고전을 쉽게 소개하는 ‘샘이 깊은 물’을 매주 한차례 마련한다. 이 난은 규장각·장서각 소속 학자들이 돌아가면서 맡는다. /편집자주

우리 민족이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문화유산 중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 고전적(古典籍) 즉 ‘옛날 책들’은 특히 자랑스럽다.

우리 선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책에서 찾았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일어나는 일을 후일의 ‘전거(典據)’로 성실히 기록해 두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500년 전 조정에서 논의된 사건을 5년 전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사안보다 더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 조상들은 서적을 지혜를 습득하고 전하는 매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소중히 취급하고 간직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조가 열강의 간섭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지식인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비판·타기하고 선진 서구 문물의 수용에 열중하였다. 그때부터 전통 서적을 경시하는 풍조가 유행하였고, 동시에 소중히 보존하려는 의식도 없어져 갔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전통 서적을 소홀히 취급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서울에 온 외국의 선교사·외교관·상인들은 오히려 우리나라 전적의 가치를 이해하고 무더기로 수집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그때 국외로 반출된 우리의 전적이 현재 일본·미국·프랑스 등의 국립도서관 혹은 유수한 대학 도서관에 수천 혹은 수만 권씩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동란은 우리의 전적 유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폭격으로 소멸된 전적도 부지기수이지만, 전쟁 직후 불쏘시개로, 혹은 휴지로, 혹은 과수원의 과일 봉지로 없어진 전적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추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국 주요 도서관과 개인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20세기 이전의 전적은 4백만~5백만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문헌 가운데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책들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전적문화의 정수이다.

규장각은 230여년 전 정조가 즉위하면서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기능과 국왕의 정치 자문에 응하는 학문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조 이후 규장각은 군주의 자문 기능은 상실하였지만 국정에 필요한 내외서적을 수집 보관하는 기능과 국왕의 일일 신변사를 기록하는 기능은 계속 유지하였다. 국운이 기울어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보호조약(1905년) 직후에는 홍문관·춘추관 등 주요 중앙관서와 지방의 깊은 산중에 설치했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던 각종 전적과 문서들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다가 1920년대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가 승계 관리하여 왔다. 규장각 도서에는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6종 8,000여책 외에 왕실기록과 문서, 지도, 책판 등 26만여건이 들어 있다.

장서각은 한일합방 후 규장각 도서가 조선총독부로 이관된 후,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설치된 도서관이다. 장서각에는 6·25동란 중 북한군에 의하여 일부가 약취당하고 현재 9만여건이 소장되어 있다.

19세기 말 이래 우리 사회에 유행하였던 전통을 멸시하는 풍조가 대략 1970년대부터 소멸되면서, 우리의 문화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고전적에 대한 일반의 의식 역시 크게 개선되어, 이제는 고전적을 함부로 훼손하는 행위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 책의 내용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번에 경향신문에서 규장각과 장서각 소장도서를 중심으로 중요한 고전적을 선택하여 일반에 소개하는 장기시리즈를 계획했다니,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고전적 유산의 정체를 우리 사회 일반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 〈송기중/서울대교수·규장각관장〉 최종 편집: 2003년 11월 17일 18:29:45

[그루터기]엉뚱하면 좀 안되나

아이에게 밥을 먹이며 아내가 말했다. “머꼬야, 멸치좀 많이 먹어. 칼슘이 들어있어서 먹으면 키가 쑥쑥 자라.” 그리고 귤을 먹이며 또 말하는 것이었다. “여긴 비타민 씨가 많이 들어 있거든. 먹어야 감기 안걸려.”

또래에 비해 아이 체구가 다소 가냘프다 보니 아내는 자꾸 신경이 쓰이나 보다. 나는 문학도답게 그걸 못 보아 넘기고, 상상력을 훼손시키는 설명이라며 트집잡았다. 귤을 들고 시범을 보였다. “이 속엔 비타민 씨뿐 아니라, 아주 시원한 바닷바람과 따가운 여름햇살, 나무가 뽑아올린 땅속 깨끗한 물이 가득 들어있거든.”

그러자 입을 오물거리며 아이가 대꾸했다. “비타민 씨가 어딨지? 귤에 왜 귤 씨가 없고 비타민 씨가 있어?” 그 바람에 우리 세 식구는 하하 웃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아이가 문득 물었다. “사람은 왜 늙어?” 증조할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후로 아이가 부쩍 죽음에 대해 자주 물어오고 있다. “누구나 늙으면 죽는 거야.” 대답하자 또 묻는다. “왜 늙어?” “그야 세포가 노화되니까, 암에 걸리기도 하고…” 내가 대답하는데, 이번엔 아내가 반격해 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더니 기독교인답게 설명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이쁘게 만들어 주셨잖아. 우리는 그 대신 세상에서 겪은 일들을 하늘나라 하느님한테 가서 들려주기로 약속했거든.” 내가 봐도 아내 설명이 더 그럴 듯했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있고부터 아이가 무얼 물어오면, 우리 부부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본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상한 맹신 속에 살고 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느니, 화를 한번 내면 수명이 몇시간 감축된다느니, 일기차로 단풍이 든다느니, 똑바로 앉아야 허리가 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갖은 구속을 가한다.

그러나 비뚜로 앉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비를 맞아가며 물웅덩이를 밟는 건 참 신나지 않는가. 저녁노을이 자꾸 묻어 마침내 잎새도 빨개진 것이라 말하면 틀리는 설명인가. 대기권 먼지로 별이 가물거린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빈약한가. 거울을 주면 고물장수는 그 무게를 달아보고, 미인은 제 얼굴만 들여다보지만, 아이들은 햇빛을 갖고 논다던가. 모든 것을 영양가나 칼로리나 통계치로 환산하는 식의 과학 지식은 자칫 얼마나 한심하고 위험한 도그마인가. 멋대로 공상하거나, 엉뚱하게 행동해보는 일이 생을 더 충만하게 해주지 않을까. 아이를 통해 자유로이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되찾는 요즈음이다. 〈이만교/소설가〉 최종 편집: 2003년 11월 16일 18:37:53

‘한국판 쉰들러’   日人 후세를 아시나요

■조선독립 앞장선 변호사 관련자료 첫공개

일본인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는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평생을 조선인의 이익과 인권과 위해 투쟁했던 일본인이 한 연구자에 의해 발굴됐다. 그러나 정부부처 사이에 이 일본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둘러싸고 이견이 보이고 있어 논란을 빚고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이규수 연구교수(한·일관계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조선인의 인권투쟁에 앞장서온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80~1953)의 일대기를 담은 ‘후세 다츠지의 한국 인식’이라는 논문을 ‘한국근현대연구’ 최근호에 발표했다. 이교수는 이와 함께 일본 메이지대·조선대 등에서 입수한 후세의 변호관련 자료, 주요 저작 등을 16일 공개했다.

일본 미야기현(宮城縣)에서 태어난 후세는 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이듬해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후세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 독립에 대해 논의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후세는 2·8독립선언 사건으로 검거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 유학생의 변론을 맡으면서 조선 독립운동 지원에 나선다. 그는 1920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창간호에서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면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한다.

이후 후세는 일본내 조선인의 독립운동, 사회주의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 조선인과 관련된 법률사건 대부분을 변론하며 조선의 독립을 지원했다.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탄투척사건, 박열의 황족 폭살기도사건 등은 그가 변론을 맡은 대표적인 사건들.

특히 1923년 간토(關東)대학살 당시 ‘조선인 학살을 사죄하며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죄문을 작성,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우송하기도 했다. 후세의 활동은 일본땅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의 사회·농민단체 초청으로 1923년, 26년, 27년 세차례 한국을 방문한 후세는 김시현의 총독부 건물 폭파기도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의 무료변론을 맡는가 하면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26년 방한 때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몰수에 맞서 싸우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변호, 현지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세는 1930년대 세번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두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일본 패전 이후에도 후세는 한신(阪神) 교육투쟁사건,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공안조례 폐지운동 등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재일한국인과 변함없는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또 해방된 조선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만들었고, 박열의 전기 ‘운명의 승리자 박열’을 출간했다.

후세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지난 8월 후세 다츠지 기념사업회(회장 정준영)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해줄 것을 우리 정부에 신청했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후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으나 외교통상부가 ‘일본인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는 것은 국민감정에 배치된다’며 반대, 선정이 보류된 상태다.

이규수 교수는 “평생을 조선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후세는 조선 민중의 벗이었다”면서 “미국인은 물론 친일논란을 빚고 있는 인사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는 마당에 국적을 따지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1월 16일 18:37:33

“네 멋대로 해라”

-하위문화의 신화와 현실-

“네 멋대로 해라”. 70년대 영국 하위문화를 주름잡은 펑크족들의 인생 좌우명이다. 플라스틱 빨래집게, 면도날, 탐폰과 같은 저속한 도구들을 패용하고, 수세식 변기줄을 몸에 두르며, 가짜 피를 묻힌 교복과 더러운 레인코트를 입고 다닌 이들의 하위문화적 스타일은 편협한 기성사회와 부모세대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다. 펑크족의 영웅이던 ‘섹스 피스톨스’는 버킹엄궁이 보이는 템스강 주변을 보트를 타고 돌면서 영국왕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영국의 무정부’를 부르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하위문화는 이렇듯 공격적인 스타일과 저돌적인 행동을 통해 기성사회의 모순을 ‘마술적으로’ 해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청년 하위문화는 계급적, 세대적인 저항의 형식으로 보기에는 그 범위가 광범위하고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 현재의 하위문화는 청년 세대들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나 유행 형식, 다양한 문화적 취향이 결속된 소집단 커뮤니티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는 과거 하위문화적 성향과 유사한 청년족들이 있고, 그냥 거리를 배회하는 또래아이들의 일상문화가 있는가 하면, 대중매체의 사건과 현상을 집요하게 모방하는 팬덤문화가 있기도 하다. 여기에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생겨난 다양한 커뮤니티 그룹들이 21세기의 새로운 하위문화 형성의 중심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하위문화는 주류문화나 공식화된 기성문화와는 다른 스타일과 소통방식을 추구하는 청년세대의 문화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하위문화는 과거 서구의 역사적 하위문화처럼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지는 않지만, 분명 기성세대와 다른 코드를 만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디지털화된 커뮤니티, 자신들만의 일상적 은어, 문신과 피어싱을 통한 몸의 자유, 스스로 생성하는 문화적 행위들의 의미체계들은 주류와 중심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자유로운 감수성이 배어 있다.

한국의 동시대 하위문화는 청년세대들의 문화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가 다양하고, 잡종이고, 탈경계화되고, 탈금기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세대들의 문화와 일상 속에 드러나는 라이프 스타일의 형식은 너무나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서 하나로 통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위문화적인 구별짓기는 계급적인 구별짓기 혹은 기성세대와의 구별짓기라기보다는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소집단들 간의 구별짓기다. 그것은 교실의 우상을 파괴하고, 입신양명의 신화를 비웃기도 하며, 몸의 도덕적 가설을 해체하고, 때로는 정치적 레드콤플렉스를 탈신비화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적 커뮤니티와 테크놀로지의 감각은 필수적이다. “네 멋대로 해라”라는 청년세대들의 인생교훈은 지금은 즐거움과 자유를 위한 커뮤니티의 결속감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향한 욕망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이동연/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최종 편집: 2003년 10월 06일 14:27:43

분출하는 하위문화

하위문화(서브컬처)의 개념은 1950년대 후반 ‘청소년 비행 행태’를 연구하던 미국 사회학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후 하위문화는 지배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청년문화로 해석돼왔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에서 저항이라는 하위문화의 본질은 약화된 모습이다. 단지 ‘제멋대로인’ 하위문화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지배문화를 위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확산을 그 이유로 꼽는다. 온라인에서 싹트고 생활속으로 파고든 하위문화. 그 현장속으로 들어가본다.

#온라인에서 싹튼 하위문화

21세기 하위문화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인터넷이다.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통신망을 통해 젊은이들은 금기시된 문화까지도 쉽게 누릴 수 있게 됐다.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이 되는 대신 온라인에 접속해 세상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는 것이다. 온라인을 통해서는 삐딱한 시선이 가감없이 전파될 수 있다.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신문 ‘딴지일보’나 연예인 풍자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오인용’, 거침없는 욕설을 퍼붓는 ‘김구라와 황봉알’은 지배문화를 철저하게 패러디하며 관심을 모았다. 젊은이들은 색다르고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글이나 플래시, 사진, 동영상 등을 이른바 ‘펌질’을 통해 다른 온라인 사이트에 옮겨놓으며 그들의 문화를 전파시켰다.

하위문화를 주도하는 네티즌은 문화 전파자만이 아닌 적극적인 문화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기존 문화를 해체하고 새롭고 실험적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이들은 문자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자판의 한글·부호·일어·영어 등 각종 문자를 조합해 새로운 문자인 ‘외계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급기야는 문자체계마저 해체시키고 이미지만 남은 ‘아’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온라인 문화를 선도하는 ‘디시폐인’들은 무엇이든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디카족’만의 특수한 놀이문화를 만들어냈다.

과거 청년문화에서 보여지는,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는 ‘마니아’적 성향도 온라인으로 옮겨와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모일 수 있도록 했고, 자연히 ‘팬덤문화’가 급격히 성장했다.

사정이 이쯤되자 젊은이들이 오히려 문화를 끌어가는 주체세력이 되고 있다. 최근 드라마 ‘다모’의 성공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다모폐인’이며, 네티즌이 뽑은 ‘얼짱’은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켰다. 요즘 인기있는 인터넷 소설은 출판 1순위다.

이제 온라인에서의 하위문화는 당당히 문화를 만들고 이끄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되던 하위문화가 온라인을 통해 확산되면서 지배문화와의 경계를 허물고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분출하는 하위문화

하위문화는 온라인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몇년 전부터 마이너리티의 공간으로 여겨진 ‘길거리’가 각광받는 무대로 떠올랐다. ‘정지’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은 ‘스케이트보드’ ‘힐리스’ ‘인라인’을 신고 거리로 나왔다. 불량청소년의 전유물이라 생각된 ‘X-게임’도 인기있는 스포츠가 됐다. 길거리에서 헐렁한 바지를 입고 힙합을 들으며 그래피티 앞에서 춤을 추는 비보이도 요즘 각종 ‘배틀’에 불려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이미 하위문화가 ‘그들만의 문화’가 아닌 까닭에 인디문화 진영인 홍대앞의 문화도 길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예술가들은 홍대앞 놀이터에서 ‘프리마켓’과 ‘희망시장’을 열었다.

지배문화에 따라가는 대신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문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수시로 길거리로 나섰다. ‘2002 한·일월드컵’ 때 붉은 옷을 입고 광화문과 시청앞을 메우면서 시작된 길거리 집회는, ‘촛불시위’까지 이어지면서 하위문화의 거대한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21세기 하위문화는 더이상 단순히 비행청소년의 행태로 판단하거나 ‘저항성’을 잣대로 정의내릴 수 없게 됐다. 언제든지 주류문화를 위협할 수 있는 거대한 문화집단이다. 아직까지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을 가진 거대한 문화산업에 흡수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잔존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중들이 꾸준히 자신의 문화를 창조하면서 기존문화를 해체하는 것은 저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문화는 우리의 미래문화를 이끌어갈 건설적인 대안임은 분명한 일이다. 〈김정선기자 kjs043@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0월 06일 14:27:33

주변에서 본 존 쿠치 “자기절제 철저한 은둔자”

존 쿠치는 은둔자 같은 삶을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수도승마냥 자기절제에 철저했다고 기억한다.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담배를 멀리했다. 고기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몸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사이클을 즐겼고, 매일 아침 적어도 1시간 이상을 책상에서 명상하듯 시간을 보냈다. 그는 국제적인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한 뒤에도 자신의 존재를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영예의 부커상(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고서도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함께 일했던 한 동료는 “쿠치와 10여년을 같이 있었지만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상한 점은 남아공에서도 그의 독자층이 얇다는 것이다. 쿠치 작품을 오래 연구한 남아공의 데이비드 아트 교수는 “대다수 남아공 사람들은 쿠치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했다.

쿠치는 여느 남아공 백인들과 달리 영어 외에 아프리카 말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백인과 흑인을 등가의 존재로 묘사한 그의 문학적 토양이 여기서 발원했는지도 모른다고 평론가들은 적고 있다. 인종에 따른 정형화된 묘사가 일반화돼 있던 남아공 문학계에서 그의 존재는 자연히 튈 수밖에 없었다.

쿠치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수학과 영어를 전공했으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욕주립대학에서 보낸 3년은 그의 삶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동료들은 술회한다. 그는 이 시기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해 체포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 영주권을 얻으려던 시도가 좌절됐다.

그는 1963년 남아공 백인여성과 결혼해 1남1녀를 뒀으나 아들은 23세 때 교통사고로 숨졌다. 아내와는 오래 별거하다 80년대에 이혼했다. 지난해 케이프타운 대학 영어교수직을 은퇴한 뒤 줄곧 호주에서 살고 있다.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최종 편집: 2003년 10월 03일 01:47:15

존 쿠치는? 남아공 ‘탈식민주의 문학운동’ 기수

관 련 기 사


 ⊙  ‘탈식민주의 문학운동’ 기수
 ⊙  전문가가 전하는 존 쿠치
 ⊙  주변에서 본 존 쿠치는
 ⊙  존 쿠치 연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쿠치는 해마다 유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돼온 세계적 작가 중 한명이다. 그는 ‘마이클 K’와 ‘추락’으로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한번 받기 어렵다는 영국의 부커상을 사상 최초로 두 차례(1983년, 1999년)나 수상하면서 탈식민주의 문학운동의 기수로 평가받아왔다.

그는 노벨문학상 선배인 나딘 고디머와 마찬가지로 모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주의를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설정했다. 그에게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특수상황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비극이다. 그러나 그는 선악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어떤 목적에도 봉사하지 못한다고 본다.

쿠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조용히 은둔하며 행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같은 수동성은 인간성을 감추는 연막이 아니라 자신들이 경멸하는 억압적인 질서와 그것의 의도에 다가서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다. 쿠치는 이런 약함과 패배의 방황 속에서 인간의 성스러운 불꽃을 발견한다.

그는 1974년 발표한 첫 작품 ‘더스크랜즈’에서 자신의 적들에게 아무 말 없이 복종하면서 마음속에 증오를 품는 주인공을 설정한다. 베트남전 와중에 미국 행정부를 위해 일하던 한 남자의 상황은 원시 아프리카를 탐험했던 원정대의 보고서와 함께 제시된다. 이 보고서는 18세기 보어 개척자의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추락’ ‘야만인을 기다리며’ 등은 쿠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조지프 콘래드의 전통을 잇는 정치적 스릴러이다. 주인공인 남아프리카의 한 치안판사는 수십년간 제국의 충실한 하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취조전문가들이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의 상황인식은 달라진다. 제국이 전쟁포로들을 잔인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희생자들을 동정하게 되며 급기야 돈키호테 같은 반역행위를 한 뒤 제국의 적으로 낙인 찍힌다.

‘추락’은 쿠치에게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하게 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지배가 종식된 이후, 새로운 환경이 제공하는 공포에 맞서 자신과 딸을 방어하려는 대학교수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는 쿠치가 생각해온 중심적인 문제, 즉 ‘역사를 회피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쿠치의 글쓰기 스타일 역시 이분법을 거부하는 그의 사상을 담고 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 젊은 흑인여성은 자기가 관계를 맺고 있는 백인과 자신을 미워하는 그의 아들을 둘 다 죽이려는 환상을 품고 그 집의 하인과 이상한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는 확실히 보여주지 않고 독자들은 그녀의 노트기록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거짓말과 진실, 거친 부분과 정선된 부분이 섞여있다. 이같은 독백스타일은 아프리카의 주변환경 묘사와 조화를 이룬다.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쿠치의 작품은 줄거리 전개에 주력하는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반리얼리즘 방식을 채용한다. 그러나 복잡한 문체가 아니라 단문을 사용하면서 사유와 해석의 깊이를 유지한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쿠치의 소설을 읽을때 천천히 음미하라고 권유한다.

이밖에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소재로 했다. 1869년 독일에 체류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뒤 파벨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과 같은 악마적 음모에 휘말리며 자신이 불가해한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소설쓰기가 무엇이며 작가의 창작윤리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

그는 ‘소년기’와 ‘청년기’라는 두 권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소년기’에서는 그의 아버지의 굴욕과 그것이 아들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를 다루는 한편 보어인과 영국인, 흑인과 백인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더불어 남아프리카의 전통적 시골에서의 삶에서 느껴지는 마술적 인상을 실어나른다. ‘청년기’는 일종의 잔인함을 지닌 청년기 자화상을 해부해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쿠치의 작품은 무척 다양하다. 어떤 작품도 비슷한 것이 없다. 그의 주인공은 절망 때문에 가라앉고 싶은 욕망에 압도당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외부환경의 잔혹함을 경험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알레고리와 윤리성·정치성이 짙은 쿠치의 소설은 백인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백인의 입장에서 해체하면서 죄의식을 고백하는 철저한 작가정신을 드러낸다.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의 수상자 결정은 의외로 쉬웠다”고 밝히면서 그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존 쿠치는 탁월한 ‘상상력의 작가’

=전문가 기고=

존 쿠치는 1940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근교의 우스터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아프리카너)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너이지만 아프리칸스어(네덜란드어가 변형된 백인언어)가 아니라 영어로 교육을 받았고 영어로 글을 써온 작가다. 그는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있는 부커상을 최초로 2회에 걸쳐 수상했고, 거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다가 드디어 그 상을 수상하게 됐다.

언어학, 수학, 컴퓨터를 전공했으며 사뮈엘 베케트 전문가이기도 한 쿠치는 “지적인 힘과 균형적 스타일, 역사적 비전과 윤리적 통찰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통합”시킨 독창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의 이러한 특성은 1980년에 발표된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어쩌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나 다름없는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에, 부커상 수상작들인 ‘마이클 K’(Life & Times of Michael K)나 ‘추락’(Disgrace)이 아니라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과 성, 휴머니즘과 폭력 등의 문제를 이처럼 빼어나게 형상화한 소설도 드물 것이다.

쿠치의 소설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하나의 문법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자와 원주민,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백과 흑 등의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진보적인 인물을 내세워 체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폭력적인 식민주의자들의 실체와 허상을 드러내는 기능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폭력적인 정권이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이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니 때로는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쿠치는 문학사에 오래오래 남을 훌륭한 작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에 대한 글들이 점점 더 많이 쓰이고, 그와 관련된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가이자 쿠치의 남아프리카 동료작가인 나딘 고디머가 그를 가리켜 “종달새처럼 날아올라 매처럼 쳐다보는 상상력을 갖고 있는 작가”라고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교수〉

노벨문학상 존 쿠치 연보

▲194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출생. 남아공과 미국에서 컴퓨터와 언어학 공부

▲60년대 초반 영국으로 이주,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동

▲74년 소설 ‘더스크랜즈(Dusklands)’로 작가데뷔

▲80년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로 세계적인 명성 얻음

▲83년까지 뉴욕주립대에서 문학과 영어를 가르침

▲83년 영국에서 ‘마이클 K의 삶과 세월’로 부커상(Booker Prize)과 프리 에트랑제 페미나상 수상

▲84년 케이프타운대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

▲86년 ‘포(Foe)’ 발표

▲90년 ‘철기(鐵器) 시대’를 집필하며 남아공으로 귀향

▲문학비평서 ‘포인트의 배가:수필과 인터뷰’(92년), ‘이중 모욕:수필과 검열’(96년), ‘하얀 필체:학문의 문화에 대하여’(98년), ‘해변의 침입자:1986~1999년의 수필’(2001년)

▲99년 소설 ‘추락’으로 부커 프라이즈를 두번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됨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라이데대 교수 부임

▲2003년 수필과 소설을 접목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8개의 레슨’

▲작품 ‘황혼의 땅’(74), ‘나라의 심장부’(77), ‘야만인을 기다리며’(80), 마이클 K의 삶과 세월’(83), ‘포우’(86), ‘철의 시대’(86), ‘페테르부르크의 대가’(94), 회고록 ‘소년기’(97), ‘추락’(99), 회고록 ‘청년기’(2002) 등

문학 나이로는 난 아직 청춘입니다   -팔십줄의‘늦깍이 소설가’김준성-

소설가에게 정년이란 없다. 문제라면 창작의 열정이지, 결코 나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50대에 들면서 점차 작품활동이 뜸해지는 것이 우리 문단의 조로(早老)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김준성(金埈成·82) 전 경제부총리의 경우는 눈길을 끈다. 여든이 넘어서도 원고지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업작가라 부르기도 어딘가 어색하지만, ‘현역 글쟁이’로서 최고령임에 틀림없다. 그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이수화학 사무실을 찾아 요즘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얘기를 들어보았다.

“예순이 넘어서야 본격 작품활동을 시작했어요. 다른 분들보다 30~40년 늦은 셈이지요. 문학 연령으로 따진다면 아직 청춘입니다”. 뒤늦게 글줄을 끼적거린다는 사실이 쑥스럽다는 뜻일까. 그럴 것이다. 그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소설같은 얘기다. 대구·제일·외환은행장과 산업·한국은행 총재를 거쳐 경제부총리를 끝으로 관직을 떠난 것이 1983년.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도대체 무엇을 더 이루겠다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라는 게 그의 답변이다.

호사가적인 취미나 뚱딴지같은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자신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어엿한 작가다. “58년, 서른여덟살 때였지요. 그때 발표 작품이 ‘인간상실’이었습니다”. 이미 문예지 ‘협동’에 단편소설이 당선됨으로써 기성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현대문학’에 작품을 낸 것도 김동리 선생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평소 동리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니, 당연히 문재(文才)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미뤄졌던 창작의 열정이 새롭게 불타오른 것은 부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최근들어 거의 한해 걸러끔씩 작품집을 내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지난해 발표한 장편소설 ‘비둘기 역설’까지 무려 8권이나 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문명(文明)의 인쇄소’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소개됐을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요즘 문학이 너무 상업화되어 대중·순수문학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평가에서도 소설에 대한 열의가 느껴진다.

꾸준한 창작활동은 요즘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전날 밤 쓴 원고를 퇴고하는 것이 중요 일과다. 특이한 점은 아직도 원고지를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 “언제, 어디서나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야 하기 때문에 원고지가 편하다”고 했다. 매일 5~6장씩은 쓰고 있다. 그는 새로 써내려가고 있는 ‘머나먼 청자(靑磁)의 빛’ 원고를 설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흐트러짐 없이 칸칸이 메워진 글씨가 그의 평소 깐깐한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삶에 있어 문학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답변은 간단했다. “문학은 내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원천”이란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신적 양식을 얻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뜻일 것이다. “소설을 쓰는 대상은 독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몇 해 전에는 계간지 ‘21세기 문학’을 창간했고, 이수문학상도 제정했다.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라는 얘기로 적자를 보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요즘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정종 12잔(1되)을 가볍게 비우던 주량이었으나 지금은 술, 담배를 모두 끊었다”며 철저한 자기 절제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저녁 술자리를 피한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비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경락요법과 냉수마찰을 하며 아침식사는 찰떡과 콩죽으로 끝낸다. 근처 공원에 들러 비둘기 모이를 주면서 산책을 즐기는 것도 비결에 속한다. 하루에 대략 7,000보 정도씩 걷는다.

나는 영원히 소설가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건강이 받쳐주는 한 계속 써내려갈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 속의 ‘활화산’을 터뜨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젊고 건강한 미소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한국 불교는 귀족 불교

"한국 불교는 귀족 불교다" 귀화 러시아인인 박노자 교수(오슬로 국립대)에 이어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스님이 한국 불교의’부조리’를 강하게 꼬집었다.

수경 스님은 <시사저널> 최근호 인터뷰를 통해 "한국 불교는 귀족 불교다. 스님들 의식도 그렇고 생활도 귀족적이다. 구조조정해야 할 데가 바로 불교계다. 선원에는 물질이 너무 풍요하다"며 불교계의 자성을 촉구했다.

북한산(사패산) 국립공원을 지나는 서울외곽순환도로의 공사저지를 위해 사패산입구에 움막을 치고 들어간 수경 스님은 "스님들이 돈을 만지는 한 불교계의 변화는불가능하다. 스님들은 수행과 전법에 힘쓰고 나머지는 다 재가불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귀족으로 살면서 사회적 역할은 외면하는 스님들, 정신차려야 한다. 법복을 입은 비구니가 폭행을 당하고 조계사 법당에 공권력이 들어가고, 북한산의 천년고찰이 훼손되는데도 모르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경 스님의 이같은 지적은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 부패 등을 외면한 채 참선만을 강조하는한국 불교는 현실도피를 방불케하는 신앙행위"라는 박노자 교수의 비판과 맥을 같이한다.

스님은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자업자득이다. 이번 기회에 참회하고 진정한 수행자로 돌아가야 한다"며 "문명으로부터 탈피해서 가능하면 원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수행 정진해야 한국 불교는 되살아난다"고 충고했다.

해인사의 초대형 청동대불 건립계획을 강하게 비판했던 스님은 "부처님을 크게만들어서 불교를 표현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국 불교의 ’귀족성’을 거듭 꼬집었다. <2002년 05월 29일>

박노자 교수, 한국불교에 ‘죽비’

"’중생을 위해준다’는 정신이 한국불교 속에 과연 남아 있는가" "하루 몇천배의 ’체육적인 수행’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이웃을 위해쓰는 것이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귀화 러시아인으로 한국불교와 고대사에 이해가 깊은 박노자 교수(오슬로 국립대)가 21일 발간된 격월간 「참여불교」(5-6월호)에 기고한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없는 한국 선(禪)’이라는 글에서 한국불교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저서와 칼럼 등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들춰왔던 박 교수는 "참선이라는 ’역경에 대한 인내’를 불교나 수행으로 생각하는 불교관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며 포문을 열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스님들의 수행담을 듣고는 "’중생을 위해준다’는 정신이한국불교 속에 과연 남아 있는가"를 고심했다는 박 교수는 "일군의 외국 스님들은한국에서 몇년씩 공부한다 해도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민층, 무의탁 노인등에 대해 말 한 마디 들어볼 일이 없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그러면서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라고 되묻는다. 박 교수가 보기에 사회의 구조적부패 등을 외면한 채 참선만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는 "현실도피를 방불케하는 신앙행위"일 뿐이다.

박 교수는 특히 한국불교가 "참선 실천만큼 계율에 대한 의지가 철저한 것으로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상적 불교의 계율관으로는 분명한 파계로밖에 안 보이는 음주와 축처에 대한 태도는 중세 가톨릭 교회를 방불케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난 스님들은 "화두나 참구 등을 통해 신비한 깨달음이 얻어진다면 사음(邪淫)이나 음주와 같은 ’작은 죄악’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봤다"고 지적한 박 교수는 "구족계를 받은 수도자들의 사회가 기본 오계도 지키지 않는 구성원을쉽게 용서해주는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많은 경우 스님과 속인들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기복적 의례와불전(佛錢)의 헌납"이라며 "특히 고차원적인 종교적 관심의 발단이 돼야 할 기복이기복 그 자체로만 끝까지 남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아가 "스님의 이미지는 신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도력을 통해 복을내려주는 매개자인 일종의 ’도사’에 가깝다"고 힐난했다.

비판 끝에 박 교수는 자신의 경우 "기도회가 잦은 인근 사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일요일의 사회봉사가 훨씬 더 즐거운 수행의 장이 됐다"며 "내가 아는 적지않은 수의 한국인 젊은 도심 불자에게도 사찰 밖의 대중적 활동은 사찰의 별천지보다 나은 수행의 장"이라고 단언했다.

박 교수는 한국불교의 희망을 재가불자들에게서 찾았다. "진보적 보살과 거사들은 불교를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의로 인식해 승가의 구습을 탈피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학 내의 권위주의적 횡포이든, 군대의 폭력문화 가용이든, 신자유주의의 비정규직 양산이든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불교적 입장으로 맞서는 데서 ’구세주의적’ 불교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라는 게 박 교수의 기대이다. < 2002년 05월 21일>